제시 리버모어: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큰 곰' 이야기

1. 소개: 제시 리버모어 - 월스트리트의 수수께끼 같은 '큰 곰'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 1877-1940)는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으며,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데이 트레이딩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 그의 투기적 거래 기법과 시장 심리에 대한 통찰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트레이더에게 연구되고 있다. 그의 삶은 극적인 성공과 처참한 실패가 반복되는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며, 이는 월스트리트 투기의 본질과 그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소년 투자자(Boy Plunger)'와 '월스트리트의 큰 곰(Great Bear of Wall Street)'이라는 상반된 별명으로 불렸다. '소년 투자자'라는 별명은 그가 10대 시절 보스턴의 사설 증권 거래소, 즉 버킷 샵(bucket shop)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고 성공적인 투기를 감행하며 얻은 것이다. 당시 '플런저(plunger)'는 무모한 도박꾼이나 투기꾼을 의미하는 속어였다. 반면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별명은 1907년 공황과 1929년 대공황과 같은 주요 시장 붕괴 직전에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얻게 되었다. 이 별명은 하락장에서도 큰 수익을 내는 그의 능력을 상징한다.
리버모어의 경력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터득한 매매 기법으로 수백만 달러, 심지어 1929년 대공황 직후에는 약 1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다. 이는 오늘날 수십억 달러에 해당하는 가치이다. 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 파산을 경험하며 전 재산을 잃기도 했다. 그의 삶은 극적인 성공과 실패, 부와 파산, 그리고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에드윈 르페브르(Edwin Lefèvre)가 쓴 고전,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Reminiscences of a Stock Operator)'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트레이더들의 필독서로 여겨진다. 리버모어의 삶은 투기의 매력과 위험, 시장 심리의 중요성, 그리고 자기 통제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전설은 단순히 돈을 벌고 잃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과정 그 자체이며, 그의 성공과 실패 모두에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리버모어라는 인물의 매력은 단순히 그의 엄청난 성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극적인 실패와 비극적인 결말이 그의 전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는 투기의 정점에 섰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인간적인 약점과 시장의 무자비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양면성, 즉 천재적인 트레이더이자 동시에 실패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그를 단순한 성공 신화가 아닌,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이다. 그의 이야기는 성공에 대한 갈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든 투자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2. 농장 소년에서 '소년 투자자'로: 초기 생애와 버킷 샵에서의 성공
제시 리버모어는 1877년 7월 26일, 매사추세츠주 슈루즈버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액턴으로 이사했으며 , 비범한 지적 능력을 보여 3살 반에 읽고 쓰기를 배웠고 , 학교에서는 3년 치 수학 과정을 1년 만에 마칠 정도로 숫자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농부가 되기를 원했고, 이는 리버모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었다.
결국 1891년, 14세의 나이에 리버모어는 단돈 5달러를 가지고 집을 나와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는 페인 웨버(Paine Webber)라는 증권 중개 회사에서 시세판 담당 소년(quotation board boy)으로 첫 직장을 얻었다. 그의 임무는 텔레그래프 티커 테이프(ticker tape)에서 나오는 주식 시세를 받아 칠판에 적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작업은 리버모어에게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하고 분석할 기회를 제공했고, 그의 시장에 대한 매료는 이때 시작되었다. 그는 꼼꼼하게 가격 변동을 작은 노트에 기록하며 패턴을 찾으려 노력했다.
리버모어의 실제 트레이딩 경력은 당시 성행했던 사설 증권 거래소, 즉 '버킷 샵(bucket shop)'에서 시작되었다. 버킷 샵은 정식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고객과 직접 주가 변동에 대한 베팅을 하는 일종의 도박장이었다. 고객은 실제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의 등락에 돈을 거는 형태였다. 버킷 샵은 적은 증거금으로 높은 레버리지를 이용할 수 있었고, 즉각적인 거래가 가능했기에 소액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객의 손실이 곧 업체의 이익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관행이 만연했다.
15세 때, 리버모어는 친구와 함께 번링턴(Burlington) 주식에 5달러를 베팅하여 3.12달러의 첫 수익을 올렸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가격 패턴을 통해 버킷 샵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곧 페인 웨버에서의 급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16세(1893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트레이더가 되었으며 , 일주일에 200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그는 15세에 첫 1,000달러를 벌었고 , 20세(1897년)에는 10,000달러를 모았다. 그의 젊은 나이와 대담한 성공은 그에게 '소년 투자자(Boy Plunger)'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의 지속적인 성공은 버킷 샵 운영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버킷 샵은 고객의 손실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리버모어처럼 계속 돈을 따는 고객을 환영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보스턴 대부분의 버킷 샵에서 출입 금지를 당했고 , 가명이나 변장을 사용하며 거래를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남아있는 버킷 샵들도 그에게 불리한 호가(bid-ask spread)를 제시하거나 제한적인 증거금 요건을 부과하며 거래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은 리버모어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버킷 샵 환경은 그에게 가격 움직임 자체에만 집중하고, 시장의 미세한 패턴을 읽어내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기초적 분석이나 뉴스 같은 외부 정보 없이 오직 시세 표시기(ticker)가 보여주는 숫자의 흐름만으로 거래하는 훈련을 한 것이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기술적 분석 중심의 트레이딩 스타일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버킷 샵 운영자들의 방해 공작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하고, 의심스러울 때는 포지션을 정리하며, 심지어 가명을 쓰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야 했던 경험은 그에게 시장의 비정함과 자기 보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러나 버킷 샵에서의 성공 방식이 정식 거래소에서 그대로 통용되지는 않았다. 1900년 9월, 23세의 나이로 뉴욕 증권 거래소(NYSE)에서 거래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 리버모어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만 달러를 5일 만에 5만 달러로 불림), 곧 큰 실패를 맛보았다. 1901년 5월, 시장 조정을 예상하고 400%의 높은 마진을 사용해 공매도에 나섰다가, 실제 거래 체결 속도와 시세 표시기의 지연 문제(ticker tape delay)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 전 재산을 잃었다. 이는 버킷 샵의 즉각적인 거래 환경과 실제 거래소의 메커니즘 차이를 간과한 결과였다. 그는 돈을 빌려 세인트루이스 같은 다른 도시의 버킷 샵으로 돌아가 자금을 다시 마련해야 했다.
이처럼 버킷 샵은 리버모어에게 양날의 검과 같았다. 그곳에서 그는 가격 흐름을 읽는 탁월한 감각과 심리적 강인함을 키웠지만, 동시에 실제 시장의 복잡성, 특히 대규모 거래가 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나 거래 실행의 미묘한 차이를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초기 경력에서 나타난 급격한 성공과 실패의 반복은 이미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할 극적인 부침(浮沈)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 탓만이 아니라, 큰 리스크를 감수하며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그의 내재적인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3. 리버모어 방식: 철학과 트레이딩 스타일
제시 리버모어의 트레이딩 방식은 수십 년간의 실전 경험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형성된 독특한 철학에 기반했다. 그는 시장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감정, 즉 희망, 공포, 탐욕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감정이 반복적인 가격 패턴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의 접근법은 오늘날 기술적 분석과 트레이딩 심리학의 많은 원칙들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가격 움직임과 시장 추세 집중: 리버모어는 기업의 내재가치나 경제 펀더멘털 분석보다는 가격과 거래량의 움직임 자체에 집중했다. 그는 "시세 표시기(tape)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었으며, 시장의 전반적인 추세, 즉 '가장 저항이 적은 경로(line of least resistance)'를 파악하고 그 방향대로 거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강세장에서는 매수(long) 포지션을, 약세장에서는 매도(short) 포지션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장이 명확한 추세를 보이지 않을 때는 거래하지 않고 관망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특정 산업군 내에서도 가장 강하게 추세를 보이는 '선도주(leading stock)'를 거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손실은 빠르게 끊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기: 리버모어의 리스크 관리 핵심 원칙은 손실을 제한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손실을 끊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작은 손실이 큰 손실로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손실이 발생한 포지션에 자금을 추가 투입하여 평균 매입 단가를 낮추는 '물타기(averaging losses)'를 절대 금기시했다. 그는 손실이 특정 수준(자신의 경우 10%를 기준으로 삼기도 함)에 도달하면 기계적으로 포지션을 정리하는 스탑 로스(stop-loss) 개념을 중요시했다. 마진콜(margin call) 요구에 응하지 않고 즉시 거래를 종료하라는 원칙도 세웠다. 반대로, 이익이 나는 포지션에 대해서는 "진득하게 앉아 있는 것(sitting tight)"이 큰돈을 버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추세가 명확히 끝났다는 신호가 나타날 때까지 이익이 나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성급하게 이익을 실현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피벗 포인트(Pivotal Points)와 시장 타이밍: 리버모어는 시장 진입과 청산 시점을 결정하기 위해 '피벗 포인트'라는 개념을 활용했다. 피벗 포인트는 주가가 일정 기간 횡보하거나 조정을 거친 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중요한 가격 수준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피벗 포인트가 나타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가, 가격이 피벗 포인트를 돌파하고 추세가 확인될 때 거래에 진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돌파 시 거래량 증가를 중요한 확인 신호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주가가 특정 저점을 찍고 반등했다가 다시 그 저점 부근까지 하락하면 그 저점이 피벗 포인트가 된다. 이 지점에서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상승하면 매수하고, 일정 수준 이하로 하락하면 공매도하는 식이다. 그는 피벗 포인트를 돌파한 후 주가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즉시 거래를 종료하는 위험 관리 원칙도 적용했다. 그의 시장 타이밍 철학은 "시장이 당신의 의견을 확인시켜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원칙에 기반했다. 피벗 포인트 개념은 현대 기술적 분석의 돌파 매매 전략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예측보다는 시장의 확인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감정 통제 (비록 그 자신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리버모어는 투기꾼의 가장 큰 적은 자기 내부에 있으며, 희망과 공포 같은 인간 본성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시장에 대해 화를 내거나 논쟁하지 말라고 했으며 , 탐욕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하거나 공포 때문에 좋은 포지션을 너무 일찍 청산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심리학(프로이트, 융)과 군중 심리에 관한 고전(찰스 맥케이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을 연구하며 비합리적인 투자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객관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지하며,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리버모어 자신은 이러한 감정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원칙을 어기고 감정적인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그의 막대한 손실과 파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우울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렸고 , 결국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가 제시한 원칙들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리버모어의 삶은 트레이딩 지식과 실행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누구보다 시장과 심리를 잘 이해했지만, 그 지식을 꾸준히 실천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규모 포지션 거래: 리버모어는 확신이 설 때 매우 큰 규모의 포지션을 구축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시장의 주요 추세를 포착했을 때 큰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 번에 모든 포지션을 구축하지 않고, 시장이 자신의 판단을 확인시켜줄 때마다 점진적으로 포지션을 늘려가는 '피라미딩(pyramiding)'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초기 진입이 성공적일 경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리스크를 수반한다. 그의 '소년 투자자'라는 별명 자체가 어린 나이에 큰 규모의 베팅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며 , 1907년과 1929년의 성공적인 거래 역시 대규모 포지션 덕분이었다. 그는 또한 레버리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 이는 그의 성공을 극대화하기도 했지만 실패 시 손실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아래 표는 제시 리버모어의 핵심 트레이딩 원칙들을 요약한 것이다.
표 1: 제시 리버모어의 핵심 트레이딩 원칙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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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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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세 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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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전반적인 추세(강세장/약세장)를 파악하고 그 방향으로 거래한다. 선도주를 공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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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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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포지션을 정리한다. 절대 손실을 평균화(물타기)하지 않는다. 스탑 로스를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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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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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나는 포지션은 추세가 끝날 때까지 보유한다 ("Sit Tight"). 성급하게 이익을 실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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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벗 포인트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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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가격 수준(피벗 포인트)에서의 돌파 또는 이탈을 확인하고 거래에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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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량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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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세의 시작, 지속, 반전 시 거래량 변화를 중요한 확인 신호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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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타이밍/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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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시장이 자신의 판단을 확인시켜줄 때까지 인내한다. 매일 거래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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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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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공포, 탐욕 등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규율에 따라 거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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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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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조언(팁)이나 시장의 소문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분석과 판단에 따라 거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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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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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나는 포지션에 점진적으로 자금을 추가하여 이익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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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항상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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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견보다 시장의 움직임 자체를 존중하고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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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칙들은 제시 리버모어가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집약한 것으로, 오늘날의 트레이더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의 삶 자체가 보여주듯, 이러한 원칙을 아는 것과 실제로 일관되게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4. 시장 정복: 1907년과 1929년의 전설적인 거래
제시 리버모어의 명성은 특히 두 차례의 역사적인 시장 붕괴, 즉 1907년 공황과 1929년 대공황 직전에 시장의 약세를 정확히 예측하고 대규모 공매도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건들에서 비롯되었다. 이 거래들은 그의 시장 분석 능력, 대담함, 그리고 타이밍 감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1907년 공황: 3백만 달러의 쿠데타
1906년,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주식 시장은 강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리버모어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상승 추세에 편승했다. 그러나 그는 곧 시장 과열의 징후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리한 직감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직전에 빛을 발했다. 그는 지진 발생 바로 전날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 주식에 대해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취했고, 지진으로 인한 시장 충격으로 이틀 만에 25만 달러에서 30만 달러에 달하는 큰 수익을 올렸다.
이후 시장이 불안정한 조짐을 보이자, 리버모어는 본격적으로 약세장에 베팅하기 시작했다. 그는 1907년 10월,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은행가들의 공황(Bankers' Panic)' 또는 '니커보커 위기(Knickerbocker Crisis)'로 불리는 급격한 시장 붕괴가 발생하기 전에 공격적으로 공매도 포지션을 늘려나갔다. 1907년 10월 24일, 시장이 대폭락하자 그의 공매도 포지션은 하루 만에 100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구원투수로 나선 거물 금융가 J.P. 모건(J.P. Morgan)은 시장 안정을 위해 리버모어에게 개인적으로 공매도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리버모어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공매도를 멈추고, 오히려 모건의 조언에 따라 저가 매수에 나서 시장 반등을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이익을 얻어 총 3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 성공은 그에게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를 월스트리트의 주요 인물로 부상시켰다. 이는 그가 시장의 극단적인 심리 상태를 읽고, 대중과 반대되는 포지션을 과감하게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1929년 대공황: 1억 달러의 공매도
192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 불리는 호황기를 맞이했고, 주식 시장은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수많은 일반 투자자들이 빚을 내어 주식에 투자했고, 시장은 유례없는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리버모어는 이러한 과열 속에서 또다시 시장 붕괴의 징후를 포착했다. 그는 특히 시장을 주도하던 선도주들의 가격이 내재가치를 훨씬 뛰어넘어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29년 초부터 은밀하게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거래 내역을 숨기기 위해 100개가 넘는 브로커를 동원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처음에는 시장이 계속 상승하면서 그의 포지션은 수백만 달러(최대 6백만 달러)의 평가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석을 믿고, 시장이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확신 하에 작은 규모의 '탐색적(probing)' 공매도를 계속 시도하며 손실을 감수했다. 마침내 선도주들이 더 이상 상승하지 못하고 하락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신호를 포착하자, 그는 본격적으로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로 기록된 주식 시장 대폭락이 현실화되면서 리버모어의 예측은 적중했다. 그는 이 역사적인 붕괴 과정에서 약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으며, 그의 이름을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기꾼 중 한 명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 엄청난 성공은 그에게 부와 명성뿐만 아니라, 시장 붕괴를 초래했다는 대중의 비난과 살해 위협까지 안겨주었다.
이 두 번의 성공적인 공매도 거래는 리버모어의 트레이딩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장의 극단적인 과열이나 공포 국면에서 대중과 반대되는 포지션을 취하는 역발상 투자(contrarian investing)에 능했다. 그는 단순히 기술적 지표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를 읽고 비이성적인 과열이나 패닉 상태를 포착하여 이를 역이용했다. 또한, 그의 성공은 단순히 예측 능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거대한 규모의 포지션을 구축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대담함과 실행력 덕분이었다. 특히 1929년 거래에서 초기 손실을 감수하며 자신의 분석을 밀어붙인 점은 그의 확신과 리스크 관리 능력을 보여준다. 더불어, 100명이 넘는 브로커를 동원하여 자신의 포지션을 숨긴 것은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는 데 있어 정보 보안과 전략적 실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5. 투기의 위험: 주요 실패와 파산
제시 리버모어의 경력은 눈부신 성공만큼이나 처참한 실패로도 점철되어 있다. 그는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큰 부를 몇 차례나 쌓아 올렸지만, 동시에 여러 번의 파산을 경험하며 모든 것을 잃는 극단적인 부침을 겪었다. 그의 실패 사례들은 그가 스스로 정립한 트레이딩 원칙들을 어겼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그리고 투기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막대한 위험과 심리적 부담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리버모어의 파산 기록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 1908년 파산: 1907년 공황에서 3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직후, 그는 면화 시장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당시 면화 전문가로 알려진 테디 프라이스(Teddy Price)의 조언을 듣고 면화를 매수했는데, 프라이스는 비밀리에 자신의 물량을 팔고 있었다. 이는 리버모어 자신의 원칙, 즉 타인의 조언(팁)에 의존하지 말라는 규칙을 어긴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손실이 발생한 면화 포지션에 자금을 추가 투입(물타기)하고, 반대로 이익이 나던 밀 포지션을 청산하는 등 자신의 또 다른 핵심 원칙인 '손실은 끊고 이익은 유지하라'와 '손실을 평균화하지 말라'는 규칙마저 위반했다. 결국 그는 이 거래로 파산했다.
- 1915년 파산: 1908년 파산 이후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는 1915년에 다시 한번 파산을 선언했다. 이 시기는 시장이 장기간 횡보하며 뚜렷한 추세를 보이지 않아 거래로 수익을 내기 어려웠고, 그의 부채는 1백만 달러 이상으로 불어난 상태였다. 이는 시장 상황이 불리할 때는 거래를 쉬어야 한다는 그의 원칙 을 지키지 못했거나, 혹은 다른 요인으로 인해 손실이 누적된 결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능력과 명성 덕분에 다시 자금을 확보하여 1차 세계대전 중 강세장이었던 철강주 거래 등으로 2년 만에 2백만 달러의 빚을 모두 갚고 1백만 달러의 리버티 본드(Liberty Bonds)를 구매할 정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 1934년 파산: 1929년 대공황 공매도로 1억 달러라는 정점을 찍었지만, 불과 5년 뒤인 1934년, 그는 세 번째(혹은 네 번째) 파산을 맞이했다. 당시 그는 220만 달러에서 250만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었고, 자산은 대부분 연금이나 생명보험 형태인 8만 4천 달러에서 18만 4천 달러에 불과했다. 이 마지막 파산의 정확한 원인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 1929년 이후의 시장 변동성 속에서 큰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93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설립과 함께 시장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의 투기적 거래 방식이 제약을 받았을 수도 있다. 시카고 상품 거래소(Chicago Board of Trade) 회원 자격도 정지되었다. 그는 이 파산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이러한 실패의 근본 원인은 그가 스스로 강조했던 원칙들을 지키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독립적인 판단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 때로는 타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큰 손실을 보았다. 손실을 즉시 인정하고 끊어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 손실이 난 포지션에 물타기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감정 통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 실제로는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고 , 심지어 기억상실을 동반한 신경쇠약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정은 그의 판단력을 흐리고 충동적인 거래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백만, 수억 달러를 운용하는 데 따르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대중의 비난 역시 그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리버모어의 삶은 투기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부의 이면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사용했던 높은 레버리지 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손실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켰다. 그의 반복적인 파산은 투기 시장에서 단 한 번의 실수나 판단 착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의 개인적인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자녀들과의 불화, 심지어 아내가 아들을 총으로 쏘는 비극적인 사건 등은 그가 겪었던 심리적 고통과 불안정성을 반영하는 듯하다. 결국 그는 1940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비극적으로 마무리했다.
아래 표는 제시 리버모어의 경력 중 주요 재정적 성공과 실패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표 2: 제시 리버모어의 주요 재정적 성공과 실패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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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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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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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재정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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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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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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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샵 거래로 $10,000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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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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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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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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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첫 진출 후 파산 (과도한 마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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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Br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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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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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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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지진 전 공매도로 $250,000-$300,000 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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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자금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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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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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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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공황 공매도 및 반등 매수로 $3,000,000 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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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 (Millio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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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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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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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 거래 실패 (팁 수용, 물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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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Br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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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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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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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파산 선언 (시장 횡보, 부채 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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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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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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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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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관련주 거래로 $3,000,000 이상 수익 및 부채 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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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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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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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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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시장 거래 (매수 후 공매도)로 $10,000,000 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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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부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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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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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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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공매도로 약 $100,000,000 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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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정점 (Peak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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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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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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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또는 네 번째) 파산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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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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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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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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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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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상태 (재산 대부분 연금/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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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모어의 실패는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천재성 이면에 존재했던 인간적인 약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시장의 법칙과 심리를 꿰뚫어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원칙들을 정립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그 원칙 안에 가두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삶은 트레이딩에서 지식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통제와 규율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증명한다. 그의 반복되는 실패 패턴은 마치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며, 이는 그의 천재성과 맞물려 그의 전설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6.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 트레이더의 바이블
제시 리버모어의 이름과 그의 트레이딩 철학이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데에는 에드윈 르페브르(Edwin Lefèvre)가 1923년에 쓴 책,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Reminiscences of a Stock Operator)'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 책은 출간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월스트리트의 고전이자 전 세계 트레이더들의 필독서로 꼽히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책은 래리 리빙스턴(Larry Livingston)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제시 리버모어의 실제 삶과 트레이딩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르페브르는 금융 저널리스트로서 리버모어와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집필했으며 , 리버모어 자신도 책의 내용 구성에 상당 부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헌사 역시 리버모어에게 바쳐졌다. 비록 리버모어 자신이 1940년에 '주식 매매 방법(How to Trade in Stocks)'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지만 ,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만큼 광범위한 독자층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얻지는 못했다.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이 책은 단순한 트레이딩 기법 설명서가 아니라, 한 투기꾼의 성장 과정과 그의 내면적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낸 매력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독자들은 주인공 리빙스턴(리버모어)이 버킷 샵의 '소년 투자자'에서 월스트리트의 거물로 성장하고, 또 파산을 겪으며 좌절하고 재기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투기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르페브르의 필력은 리버모어의 경험을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로 승화시켜, 금융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도 흥미롭게 다가간다.
둘째, 이 책은 시장 심리와 트레이딩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리버모어(리빙스턴)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들은 시장이 논리나 이성보다는 탐욕, 공포, 희망과 같은 인간의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을 강조한다. "월스트리트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투기는 산처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식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 같은 명언들은 시장의 변동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 심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셋째, 책 속에 담긴 트레이딩 원칙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추세를 따르라, 손실은 빨리 끊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라, 시장이 당신의 의견을 확인시켜줄 때까지 기다려라, 감정을 통제하라, 팁에 의존하지 말라 등 리버모어가 제시하는 원칙들은 오늘날 기술적 분석과 리스크 관리, 트레이딩 심리학의 핵심적인 내용과 일치한다. 이 책은 이러한 원칙들을 딱딱한 이론이 아닌, 실제 경험담과 생생한 비유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은 단순한 전기나 투자 지침서를 넘어, 시장과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담은 문학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르페브르는 리버모어의 극적인 삶을 통해 투기의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된 위험과 인간적인 고뇌를 균형 있게 담아냈다. 책의 주인공 리빙스턴은 성공한 영웅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실수를 반복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때로는 오만함에 빠지기도 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묘사는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결론적으로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은 제시 리버모어라는 전설적인 인물의 삶과 철학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이 없었다면 리버모어는 단순히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 변덕스러운 투기꾼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뛰어난 서사 능력과 리버모어의 깊이 있는 통찰력이 결합된 이 책은, 그의 경험을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으로 승화시켰고, 그를 단순한 트레이더가 아닌 시장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책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리버모어의 유산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7. 리버모어의 유산: 큰 곰에게서 배우는 교훈
제시 리버모어는 비록 파산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의 트레이딩 세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경험과 통찰력은 수많은 트레이더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에, 투기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그의 경력에서 얻을 수 있는 핵심 교훈들은 다음과 같다.
기술적 트레이딩 개념의 선구자 역할: 리버모어는 기업의 재무 상태나 경제 지표 같은 펀더멘털 분석보다는 주가와 거래량의 패턴, 추세, 그리고 시장 심리를 분석하여 거래하는 기술적 분석의 초기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강조했던 '추세 추종', '피벗 포인트'를 이용한 진입 시점 포착, '거래량 확인' 등의 개념은 현대 기술적 분석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는 시장의 움직임 자체가 모든 정보를 반영한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초기 형태와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세 표시기(tape)를 읽는 능력을 통해 시장의 '가장 저항이 적은 경로'를 찾아내려 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직관적이면서도 체계적이었으며, 후대의 기술적 분석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위험 관리와 규율의 중요성 (주로 그의 실패로부터 배움): 리버모어는 "손실은 빨리 끊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라"는 원칙을 포함하여 명확한 위험 관리 규칙을 강조했다. 그는 손실을 평균화하는 것(물타기)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 포지션 규모를 신중하게 결정하며, 시장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경우 즉시 손실을 인정하고 빠져나오는 규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유산 중 가장 강력한 교훈은 그 자신의 실패 경험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세운 규칙들을 어겼을 때마다 큰 대가를 치렀다. 그의 파산은 규율 없는 투기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따라서 그의 삶은 위험 관리와 규율 준수가 트레이딩 성공의 필수 조건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트레이딩의 심리적 어려움: 리버모어는 트레이딩이 기술적인 능력만큼이나 심리적인 싸움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탐욕, 공포, 희망과 같은 감정이 어떻게 트레이더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내심, 객관성, 그리고 감정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통찰력은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을 통해 널리 퍼졌고, 이 책은 트레이딩 심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개인적인 고뇌와 심리적 어려움 은 트레이딩이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가하는 극심한 정신적 압박을 보여주는 사례 연구로서 가치가 있다. 그의 유산은 시장 분석 능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성공적인 트레이더가 되기 위한 핵심 요소임을 강조한다. 시장과 기술은 변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에 , 그의 심리적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하다.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딩 아이콘으로서의 지속적인 위상: 여러 차례의 파산과 비극적인 자살이라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제시 리버모어는 여전히 월스트리트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그의 이야기는 성공과 실패, 천재성과 인간적 약점이 뒤섞인 복잡한 내러티브를 제공하며, 이는 단순한 성공 신화보다 더 강력한 매력을 지닌다. 그의 삶은 투기의 세계에 대한 매혹과 경고를 동시에 전달하며, 그의 이름은 대담한 예측, 막대한 부, 그리고 극적인 몰락과 동의어가 되었다.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통해 그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의 트레이더들에게 읽히고 분석되면서 , 그의 유산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트레이딩의 본질과 심리에 대한 영원한 탐구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이야기가 주로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이라는 매력적인 서사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은 그의 유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이 없었다면 그는 변덕스러운 투기꾼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었지만, 책의 성공은 그의 경험을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로 포장하여 그의 아이콘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결론적으로 제시 리버모어의 유산은 그의 성공적인 거래 기법뿐만 아니라, 그의 실패와 인간적인 고뇌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는 기술적 분석과 트레이딩 심리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삶은 위험 관리와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력한 교훈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는 투기의 본질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경고를 동시에 주고 있다.
8. 결론: 월스트리트 거인의 흥망성쇠
제시 리버모어의 삶은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 중 하나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시작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장을 읽고 예측하여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 올린 그의 여정은 투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특히 1907년과 1929년, 두 차례의 역사적인 시장 붕괴를 예측하고 '월스트리트의 큰 곰'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거둔 그의 성공은 전설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눈부신 성공만큼이나 처참한 실패로 얼룩져 있다. 그는 여러 차례 파산을 경험하며 모든 것을 잃었고, 자신이 정립한 엄격한 트레이딩 규칙들을 스스로 어기면서 몰락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시장 분석 능력과 기술적 기교만으로는 투기에서 성공할 수 없으며, 철저한 자기 규율과 감정 통제가 필수적임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그는 시장의 법칙은 꿰뚫어 보았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적 혼란과 싸움에서는 결국 패배했다. 이러한 명석한 시장 통찰력과 파괴적인 인간적 약점 사이의 극명한 대조는 그의 이야기를 단순한 성공담이나 실패담을 넘어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탐구로 만든다.
그의 트레이딩 철학, 특히 가격 움직임과 추세에 대한 강조, 피벗 포인트 개념, 위험 관리 원칙, 그리고 시장 심리에 대한 통찰은 현대 트레이딩 이론과 실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드윈 르페브르의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은 그의 경험과 지혜를 담아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제시 리버모어의 이야기는 투기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삶은 엄청난 부를 향한 인간의 열망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위험,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로서의 자기 통제 능력에 대한 영원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전설적인 지위는 그의 성공뿐 아니라 그의 실패와 비극적인 결말까지 포함하여 완성되며, 월스트리트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매혹적인 동시에 서늘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의 삶은 투기의 세계가 제공하는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존재하는 파멸의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월스트리트의 영원한 신화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