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대왕: 아시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한 황제

(I) 서론: 아소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
인도와 세계사에서 중추적인 인물인 아소카 마우리아를 소개합니다. 그는 광대한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2-185년경)의 세 번째 황제였습니다. 그의 유산은 심오한 역설에 싸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자비한 팽창으로 알려졌던 통치자가 잔혹한 전쟁 이후 극적인 변화를 겪고 평화, 윤리적 통치(법), 불교의 세계적 전파의 옹호자가 된 것입니다. 폭력적인 정복을 포기하고 법(Dhamma), 사회 복지, 불교 전파에 통치를 바친 그의 결정은 강력한 군주들 사이에서 그를 독특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통치자들이 군사적 승리로 유명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소카의 명성은 주로 제국 정복이라는 전통적인 길을 포기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의 유산은 그가 멈춘 행위(전쟁 수행)만큼이나 그가 한 행위(법과 불교 증진)에 의해 정의됩니다. H.G. 웰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를 계몽된 군주제의 드문 사례로 인정했습니다. 그의 현대적 중요성은 인도의 국가 상징에 미친 영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흥미롭게도, 수 세기 동안 그의 유산은 거의 잊혔다가 19세기에 그의 칙령이 해독되면서 재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재발견은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주요 자료와 해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삶, 극적인 변화,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탐구할 것입니다.
(II) 왕자에서 황제로: 아소카의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아소카는 기원전 321년경 할아버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창건하고 아버지 빈두사라가 계승한 마우리아 왕조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304년경 수도 파탈리푸트라(현대 파트나)에서 빈두사라와 왕비(전승에 따라 수바드랑기 또는 다르마로 불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족으로서 그는 행정과 무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초기 기록들은 그가 대담하고 유능했지만 다소 잔인했으며, 아버지가 그를 싫어했을 수도 있다고 묘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탁실라의 반란을 진압하고 웃자인(아반티)의 총독을 지내며 유능한 장군이자 행정가임을 증명했습니다.
아소카의 초기 생애, 특히 그의 잔인함("아소카의 지옥")이나 99명의 형제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주로 후대의 불교 자료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불교의 변화시키는 힘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개종 전 사악함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교 문헌은 종종 불교 신앙의 긍정적인 영향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 아소카의 초기 잔인함을 과장하면 그의 후속적인 불교 평화주의로의 전환이 더욱 극적이고 기적적으로 보이게 하여 불교를 미화하는 효과를 냅니다. 따라서 권력 장악 과정에서 아소카가 야심 차고 유능했으며 계승 경쟁에 직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 극단적인 잔인함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기보다는 그의 후기 신앙의 구원력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전설적인 구성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원전 272년경 빈두사라가 사망한 후 계승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소카는 경쟁자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아마도 라다굽타와 같은 대신들의 지원을 받아 왕좌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원전 268년경에 즉위했으며 , 황제로서의 초기에는 마우리아의 팽창 정책을 계속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웃자인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승려들의 간호를 받거나 비디샤 출신의 아내 데비를 통해 일찍부터 불교에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탁실라와 웃자인 같은 다양한 지방을 다스린 경험 은 아소카에게 광대한 마우리아 제국의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다양성을 직접 접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경험은 그가 나중에 다양한 집단에 적용 가능한 통일된 윤리 규범(법)과 관용을 강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힘만으로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수 있습니다.
(III) 전환점: 칼링가 전쟁
칼링가 전쟁은 아소카 통치의 중추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칼링가(현대 오디샤 및 안드라프라데시 일부)는 동해안에 위치한 번영하고 독립적인 왕국이었습니다. 침략의 동기는 전략적 위협 제거, 제국적 야망, 경제적 번영 및 무역로 확보 등 복합적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아소카 즉위 8년째인 기원전 261년경에 발발했습니다. 전투는 다야 강 유역 또는 다울리 언덕 근처에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 그 규모와 잔혹성은 엄청났습니다. 칼링가인들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 아소카 자신의 제13 암각 칙령에 따르면 10만 명이 사망하고 15만 명이 추방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하는 등 끔찍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아소카가 즉위 후 치른 유일한 주요 전쟁이었으며, 마우리아 제국의 군사적 팽창의 종식을 알렸습니다.
아소카가 자신의 칙령에서 이 엄청난 학살, 죽음, 고통을 목격하고 깊은 후회와 참회를 표현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고대 제국의 역사에서 승리한 통치자가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를 공개적으로 기록하고 후회하며 근본적인 정책 전환(폭력적인 정복 포기)의 이유로 삼은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승리한 황제가 공개적으로 자아비판을 한 것은 고대 역사상 이례적인 일입니다.
아소카가 언급한 사상자 수치(10만 명 사망, 15만 명 추방)는 전쟁의 참상을 전달하지만, 어느 정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고대 사료의 사상자 수는 종종 수사적 효과를 위해 과장되기도 합니다. 정확하든 과장되었든, 이 수치는 전쟁의 끔찍한 대가를 강조하고 그가 이후 법(Dhamma)으로 전환한 것을 정당화하는 아소카의 목적에 부합했습니다. 정확한 수치보다는 아소카에게 미친 영향과 그의 후속 조치가 역사적으로 더 확실합니다. 이 공개적인 참회 행위 자체가 참회만큼이나 중요하며, 전형적인 제국의 자기 표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IV)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다: 아소카의 불교 귀의
아소카의 불교 귀의는 칼링가 전쟁의 여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이는 그의 세계관과 통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칼링가의 참상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여겨지지만, 증거에 따르면 아소카는 전쟁 이전에 이미 불교에 노출되었거나 관심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아내 데비나 그가 부상당했을 때 간호했던 승려들을 통해서였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의 개종이 칼링가 이후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는지, 아니면 전쟁 이후 절정에 달한 점진적인 과정이었는지에 대해 논쟁합니다.
진정한 영적 변화와 함께 정치적 실용주의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불교는 값비싼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비폭력 철학을 제공했으며, 그 윤리적 틀(법)은 다양한 제국을 통합하는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칼링가 전쟁 이후 아소카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치적 재브랜딩의 뛰어난 사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잔혹한 정복자('찬다쇼카' - 사나운 아소카)의 이미지에서 의롭고 자비로운 통치자('다르마쇼카' - 의로운 아소카)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사적 전환은 특히 정복된 칼링가 지역에서 그의 지속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법(Dhamma)이라는 기치 아래 광대하고 다양한 제국을 통합하는 도덕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개종 이야기는 개인적인 경험과 정치적 목적 모두에 부합했습니다.
그는 아힘사(비폭력)와 자비와 같은 핵심 불교 교리를 채택하여 '칼에 의한 정복'을 포기하고 '법에 의한 정복'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칙령에서는 자신을 "우파사카"(재가 신자)라고 밝혔습니다.
아소카의 비폭력(아힘사)에 대한 헌신은 주로 외부 침략 전쟁의 중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국가의 강제력 장치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불교 전설 자체도 때때로 경쟁자나 반대파에 대한 지속적인 폭력을 묘사합니다. 그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으며 , 그의 칙령은 여전히 사법적 처벌(공정성을 옹호했지만)을 언급합니다. 이는 아힘사를 실용적으로 적용했음을 시사하며, 확립된 제국 내에서 내부 질서와 안보를 유지하는 수단을 유지하면서 팽창주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는 모든 국가 권력이나 내부 치안의 완전한 포기라기보다는 공격적인 전쟁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V) 법(Dhamma)에 의한 통치: 아소카의 도덕 규범
아소카의 법(Dhamma)은 특정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인 도덕 및 윤리 규범으로 정의됩니다. 이는 사회적 조화, 복지, 올바른 행동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칙령에서 도출된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비폭력 (Ahimsa): 인간과 동물에 대한 비폭력, 도살 및 제사 제한 포함.
- 관용: 모든 종교 종파(브라만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와 의견 존중.
- 존중: 부모, 연장자, 교사, 브라만, 슈라마나(수행자) 존중.
- 자비와 관대함: 친구, 친척, 하인, 노예, 가난한 자, 노인에 대한 친절과 관대함.
- 진실성, 청정, 온화함, 절제.
- 복지: 국민의 안녕에 대한 국가의 관심(사회 복지 조치).
- 무의미한 의례와 미신 반대.
법은 공유된 가치를 증진하고 갈등을 최소화함으로써 복잡하고 다양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아소카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이는 물리적 정복(베리고샤)을 도덕적 정복(담마고샤)으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법을 전파하고 감독하기 위해 법 마하마트라(Dhamma Mahamattas)라는 관리를 임명했습니다.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 아소카는 법을 순전히 불교 교리가 아닌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용어로 의도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는 마우리아 제국의 다양한 종교적 환경(브라만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포함) 전반에 걸쳐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통일된 이념을 만들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개인적인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사회적 결속과 행정적 안정을 촉진했습니다.
아소카의 군사적 정복(베리고샤)에서 '법에 의한 정복'(담마고샤)으로의 전환 은 국가 운영에서 '소프트 파워'를 사용한 초기 사례를 나타냅니다. 그는 오직 힘에 의존하는 대신 도덕적 설득, 윤리적 모범, 복지 계획을 통해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의 칙령과 관리들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VI) 메시지 전파: 아소카의 노력
A. 칙령: 돌에 새긴 목소리
아소카는 자신의 법(Dhamma)과 정책을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칙령을 사용했습니다. 이 칙령들은 바위, 잘 닦인 단일 기둥(종종 사르나트의 유명한 사자 주두와 같은 동물 주두로 장식됨), 동굴 벽에 새겨졌습니다. 이들은 광대한 제국 전역(현대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방글라데시)의 공공장소와 무역로를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사용된 언어와 문자는 주로 브라흐미 문자로 쓰인 프라크리트어(마가디어 방언)였지만, 북서부에서는 카로슈티 문자, 칸다하르와 같은 국경 지역에서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통치자가 광대한 제국 전역에 걸쳐 돌이라는 영구적인 매체에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새겨 대중에게 직접 소통하려 한 것은 전례 없는 대규모 커뮤니케이션 및 홍보 노력이었습니다. 이는 중개자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직접 전파하여 광범위한 이해와 준수를 목표로 한 의지를 반영합니다. 또한, 칙령에 여러 언어와 문자(프라크리트어/브라흐미, 카로슈티, 그리스어, 아람어)를 사용한 것 은 마우리아 제국의 언어적 다양성에 대한 정교한 이해와 메시지가 다양한 인구 집단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전달되도록 보장하려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는 광대한 거리에 걸쳐 다국어 소통을 관리할 수 있는 행정 능력을 강조합니다.
칙령의 주요 내용은 법의 원칙, 사회 복지 조치(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 우물, 나무 심기), 종교적 관용, 칼링가 전쟁에 대한 아소카의 후회, 관리(라주카, 법 마하마트라)에 대한 지침, 생명 존중 등이었습니다. 칙령은 여러 범주로 나뉩니다: 소암각 칙령(종종 더 개인적이며 때때로 아소카의 이름을 언급함), 대암각 칙령(법 정책을 상세히 설명하는 14개 칙령), 소석주 칙령(종종 불교 중심적), 대석주 칙령(후기 통치, 법 요약).
B. 기념비적 후원: 스투파와 승원
아소카는 불교에 대한 지원의 핵심 부분으로 불교 건축 프로젝트를 광범위하게 후원했습니다. 부처의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84,000개의 스투파를 건설했다는 전설적인(아마도 과장된) 주장이 있습니다. 검증 가능한 예로는 특히 산치의 대탑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가 처음 의뢰했으며(아마도 나중에 확장된 더 단순한 벽돌 구조였을 것임), 그의 아내 데비의 고향인 비디샤 근처에 있습니다. 스투파는 유물 봉안 무덤이자 예배 장소로서 중요했습니다. 그는 또한 승려들을 위한 비하라(승원)와 기타 거주지 건설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후원은 불교를 증진하고 승가(승려 공동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제공하려는 그의 목표와 연결됩니다.
아소카의 대규모 불교 기념물(스투파, 기둥, 승원) 건설은 종교적 헌신뿐만 아니라 제국의 권력, 경건함, 정당성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물들은 그의 통치와 그가 선택한 이념(법/불교)의 상징으로 풍경을 물리적으로 표시하여 그의 권위를 강화하고 그의 통치를 종교적 공덕과 연관시켰습니다. 또한, 산치 대탑의 위치를 아소카의 아내인 비디샤 출신 데비 왕비와 연결하는 전승 은 웅장한 제국 전략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요인과 지역적 연결이 주요 기념물의 배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또한 데비와 같은 여성이 아소카의 종교적 성향이나 후원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C. 세계적 포교: 인도 너머로 불교 전파
아소카는 자신의 법 전파의 핵심적인 측면으로 불교를 국제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법 마하마트라를 임명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선교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유명한 포교 활동은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미타를 스리랑카(실론)로 파견한 것입니다. 이들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개종시키고 보리수 묘목을 가져가는 등 섬에 불교를 확고히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칙령과 불교 전승에 따르면 포교 대상 지역은 동남아시아(수완나부미 - 미얀마/태국), 중앙아시아(간다라, 카슈미르, 히말라야 지역), 심지어 서아시아/지중해의 헬레니즘 왕국들(칙령에 언급된 그리스-요나,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키레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아소카의 불교 포교단, 특히 헬레니즘 서방으로 파견된 포교단은 단순히 종교 전파 이상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외교적 교류와 문화 교류의 한 형태를 나타냈으며, 서방에서 대규모 개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공유된 윤리적 이상(법)에 기반하여 마우리아 제국과 먼 강대국 간의 연결을 촉진했습니다.
아소카 자신의 자녀(마힌다와 상가미타)가 이끈 스리랑카 포교단 은 마우리아 황제가 이 섬에 부여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투자는 포교의 성공을 보장하고 스리랑카가 테라와다 불교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다음 표는 아소카의 주요 불교 포교 활동을 요약한 것입니다.
지역/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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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된 주요 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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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실론/탐라파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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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힌다 (아들), 상가미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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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 간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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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잔티카/마히얀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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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사만달라 (마이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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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데바 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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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시 (북 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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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키타 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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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란타카 (서인도: 구자라트, 신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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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담마락키타 (그리스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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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라타 (마하라슈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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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담마락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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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국가 (그리스/헬레니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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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락키타 / 아소카 칙령에 안티오코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 안티고노스 2세, 마가스, 알렉산더에게 포교단 파견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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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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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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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완나부미 (미얀마/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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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와 웃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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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승가 강화: 제3차 불전 결집
아소카는 기원전 250년경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열린 제3차 불전 결집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결집의 목적은 이단적인 교리(특히 테라와다의 전신인 비바자바다 학파와 다른 견해)를 논박하고, 왕실 후원으로 인한 물질적 이득을 위해 승가에 들어온 승려들을 추방하며, 교리의 순수성을 확립함으로써 승가(승려 공동체)를 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 목갈리푸타 티사가 주재했습니다.
아소카의 관대한 후원은 불교 성장에 결정적이었지만,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불성실한 개인("가짜 승려")들을 승가로 끌어들이는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제3차 결집은 아소카 자신의 성공의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교리적 및 규율적 순수성을 재확인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국가 지원의 단점을 관리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타밧투(아비담마 피타카의 일부로, 이단을 논박함) 편찬 , 테라와다 전통에 따른 팔리 경전(삼장)의 최종 확정, 그리고 주요 국제 포교 활동 시작 결정. 제3차 결집은 비바자바다 학파(테라와다 불교의 전신)의 특정 교리를 공고히 하고, 특히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 이 특정 전통을 전파한 조직적인 포교 노력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테라와다 불교가 지배적인 형태가 되는 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VII) 아소카의 영원한 유산
아소카의 장기적인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그의 후원, 칙령, 기념물, 포교 활동을 통해 불교를 비교적 작은 인도 종파에서 주요 세계 종교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윤리적 리더십, 사회 복지, 비폭력, 종교적 관용(법의 정복)을 국가 정책으로 장려함으로써 통치 개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소카의 법이 평화와 안정을 목표로 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비폭력 강조와 군사적 준비 태세에 대한 잠재적 소홀함이 그의 사후 마우리아 제국의 급격한 쇠퇴에 기여했는지 여부를 추측합니다. 이는 이상적인 윤리적 통치와 내부 분열 및 외부 위협에 취약한 고대 대제국 유지의 실용적인 요구 사항 사이의 잠재적 긴장을 시사합니다. 그의 사후(기원전 232년경) 마우리아 제국은 약한 후계자, 광대한 제국 규모, 또는 그의 정책에 대한 반발(그의 평화주의와 쇠퇴 사이의 연관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과 같은 요인으로 인해 쇠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은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인도에서는 그의 사르나트 기둥의 사자 주두가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어 그의 통치에서 비롯된 평화, 정의, 용기의 이상을 상징합니다. 아소카의 사자 주두를 인도의 국가 상징으로 채택한 것은 현대 국가가 그의 유산을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을 나타냅니다. 아소카의 평화, 관용, 정의로운 통치(법)의 이상을 기념하면서도, 이러한 상징주의는 종종 그의 통치의 복잡성(예: 칼링가의 잔혹성, 그의 개종에 대한 논쟁, 법 뒤의 잠재적 정치적 동기)을 단순화하여 현대 국가 서사에 맞춥니다.
(VIII) 결론: 전사 왕에서 법륜을 굴리는 군주로
아소카 대왕의 여정은 전통적인 정복자에서 불교 윤리에 따라 통치하는 황제로의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의 주요 공헌은 칙령을 통한 법의 전파, 불교 기념물과 결집 후원, 그리고 불교를 세계 종교로 변화시킨 포교 활동의 시작입니다. 그는 윤리적 리더십의 모델로서, 그리고 그의 유산의 복잡성 속에서 영원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의 이야기는 권력이 어떻게 연민과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변화가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대를 초월한 증거입니다.